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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사람들 6 샛령- 진부령 부럽지 않던 잊혀진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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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18-08-2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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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타래에서 풀려난 한가닥 실처럼 외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샛령으로 가는 길.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도 사람들의 왕래가 더 빈번했던 고개라 했다. 경사가 완만한 데다 거리도 지금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던 탓이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돈이 귀했어요. 필요한 물건은 바꿈이를 했죠. 소금이니 고등어자반, 미역 따위를 지게에 지고 고개를 넘어 콩이나 팥 등의 곡물과 맞바꾸고 그랬어요.” 샛령의 영동쪽 들머리 마을인 고성군 도원리 전기덕(61) 이장은 ‘바꿈이’는 물물교환을 뜻하고, 바꿈이를 위해 지게에 소금이니 고등어자반, 미역 따위를 지게에 지고 고개를 넘던 이들을 ‘선질꾼’이라 불렀다고 설명을 보탠다. 그 당시에는 귀하게 마을에 양조장과 담배포가 있었고 고개 밑까지 12칸 집이 있을 정도로 샛령은 붐비는 고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인근에서조차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50여리길 곳곳에 남아 있는 집터와 주막터, 그리고 조장골, 마장터, 성황당, 지킴이, 원터 따위의 옛 이름만이 옛길과 옛 사람들의 삶을 더듬는 징검돌로 남아 있을 뿐이다.

샛령을 올라가다 보면 여기저기 집터가 널려 있다. 화전민 정리사업이 실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이곳저곳에는 40여호가 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골짜기 곳곳에 거짓말이다 싶을 정도로 너른 들판이 있었던 탓이다. 한국전쟁 뒤 마꾼이나 선질꾼의 발길이 끊어졌어도 땅이 넓고 기름져 사람들은 샛령을 떠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고개 서쪽으로는 마장터가, 동쪽으로는 원터가 넓기로는 으뜸이다. 그러나 이제 마장터는 빽빽한 낙엽송과 잡초에 뒤덮였고, 원터는 억새의 천국이 된 채 오가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마장터는 미시령 초입에서 시작되는 서쪽 들머리에서 한시간 거리인 작은 샛령 너머에 있다. 70년대 초반 독가촌 정리사업 때 사람들을 내보내고 심었다는 낙엽송이 빽빽하게 시야를 가리는 곳부터가 마장터다. “여기가 마장터요. 저기는 주막이 있던 자리라고 하고 마방은 저쯤에 있었대요.” 샛령에 들어와 산 지 햇수로 8년이 됐다는 이천만(48)씨는 오가는 약초꾼들에게 들었노라며 약간의 내력을 들려준다. 마장(馬場)터란 이름도 원통장으로 향하던 마꾼들이 쉬는 주막이 있던 데서 연유된 것이다. 인근 산골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건을 구하려고 모여들다 보니 자연스레 장이 서게 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돼 봄이면 종자를 구하기 위해 인근 농부들이 몰리던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한 밭에 같은 종자를 몇 년 심으면 병도 많아지고 소출도 줄어요.” 도원리 전 이장도 종자를 구하러 이른 봄 녹지 않은 눈에 다리가 푹푹 빠지는 고갯길을 넘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놓는다. 마장터 종자는 소출도 많아 인근 농부들에겐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마장터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지은 지 70∼80년이 됐다는 귀틀집은 굴피지붕 위로 비닐 천막이 얹어지고 그 위는 억새로 이은 초가가 또 얹혀 있다. 이런 집 세 채가 샛령으로 난 길에서 살짝 빗겨난 골짜기에 그림처럼 놓여 있다. 속초 사람인 전중기씨가 산다는 귀틀집에는 소나무를 깎아 만든 문패까지 걸려 있다. 겨울에는 이천만씨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만 여름에는 개울가 움집에까지 나물꾼이며 약초꾼이 들어와 제법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 한다. 미시령 길가 천막집에서 살며 버섯이며 약초를 직접 캐어 팔며 가끔 마장터로 넘어오는 영봉섭씨, 어쩌다 오가는 등산객들만이 이씨의 유일한 친구이다.

마장터를 지나 샛령 마루로 가는 길 곳곳에 널려 있는 집터들에는 흔한 깨진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는다. 돌담의 흔적만이 이곳이 집터였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남을 게 뭐 있우, 기껏해야 굴피 아니면 너와였을 테고 벽이야 흙이 고작인데 벌써 바람에 다 날려갔거나 썩어 버렸지.” 옛 사람들의 집은 사람들이 떠나면 이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올렸더래요. 소까지 한 마리 잡고 크게 지냈어요.” 전 이장의 말마따나 마루에는 커다란 돌로 이뤄진 성황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었다. 대간을 남북으로 이어 걷는 종주 산행에 나선 이들이 하룻밤을 머무느라 그랬을 것이다. 나뭇가지에는 온통 빨갛고 노란 표지기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샛령 동쪽 사면은 지난 12월에 내렸던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경사가 급하고 오가는 이가 없는 탓에 길은 여기저기 끊어지기도 하고 갈지(之)자 굽이가 일자로 이어지기도 했다. 폐결핵 환자가 3년 동안 머물면서 병을 고쳤다는 찬샘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도원리 전 이장은 자신이 동행했으면 찬샘을 찾아 물 맛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간밤의 심한 바람에 쓰러지거나 부러진 가지들이 가뜩이나 스산한 겨울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다. 계곡은 온통 이끼가 뒤덮여 있고 낙엽은 무릎까지 쌓여 있다. “봄이 오면 좀 나은데 요즘 누가 산에 올라가나.”불과 50여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빈번하게 오가고 인공 때는 공산당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군이 후생사업을 한다고 나무를 베어냈다는 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숲은 우거져 있었다.

12칸 집이 있었다는 지킴이의 유래를 아는 이는 찾을 수 없다. 옛날 가끔씩 마적단이 나타나는 통해 일찍부터 사람들이 아랫마을인 원터로 내려와 살았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었노라는 전 이장의 말이 전부였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다는 원터는 억새의 천국이 돼버렸다. 양조장이 있던 터에는 돌배나무 한그루와 여전히 맑은 물을 솟아내는 샘물이 오가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뿐 사람들의 흔적은 억새에 묻혀 버렸다. “산 너머에 포 사격장이 있어요. 가끔씩 피탄이 날아든다고 사람들을 도원리로 이주시켰는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방이 산으로 막힌 원터에 저수지가 들어선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 탓이다.

도원리는 원래 지금의 도원리 저수지에 마을이 있었다. 토성면과 죽왕면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60년대 후반 저수지를 만들면서 지금의 마을은 산중턱에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한다. “아래도 저수지고 위도 저수지면 사람이 못살아요. 더군다나 속초사람들 먹을 물을 댈 저수지라는데 아래 저수지에 물을 주겠어요. 농사도 끝장 나는 거지요.” 어떻게든 새 저수지가 들어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전 이장의 각오였다.

고성산불에 1년에 1천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려주던 송이 밭을 다 태운 도원리는 최근 수려한 마을 계곡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관광지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저수지가 들어서면 그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른들 돌아가시기 전에 옛 이야기들을 더 들어뒀어야 하는 건데.” 전 이장의 이런 아쉬움도 최근 원터에 대해 물어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것이다.

마을 입구에 마을의 옛 이름을 새긴 돌을 새로 세우고, 그동안 방치됐던 옛 원님들의 공덕비를 새로 매만지는 전 이장의 손길에는 대대로 물려온 고향 땅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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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터 지킴이 이천만씨

“여기는 사유지래요.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할머니가 여름이면 나물을 뜯으러 들어와요.” 자신의 집이 아니라며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던 이천만씨는 조금씩 낮이 익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머리에 피도 마르기 전”인 스무 살 남짓부터 산판에 뛰어들어 한때는 유명한 목도꾼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양양 미천골 벌목 때 너무 커서 아무도 나르지 못하던 나무를 끌어내린 것도 그였고, 최근 서울 어느 절이 중건할 때 기둥으로 쓸 나무를 베기 위해 삼척까지 불려간 것도 그였다.

전국의 유명한 산은 다 돌아다닌 이씨지만 이제 벌목하는 곳도 없는 데다 있다고 해도 포크레인 한대면 못하는 일이 없게 돼 부르는 곳이 없다고 했다. 30여년이 다 돼가는 산생활 동안 한번도 산삼을 캐지 못했다는 이씨는 한겨울 홀로 지내야 하는 산생활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에는 산을 보는 것이 편한 데다 요즘 들어 늘기 시작한 등산객들이 행여라도 춥다고 불을 때다가 집에 불이라도 날까봐 염려가 큰 탓이다. “남의 집에 그냥 들어와 사는 것도 미안한데 불이라도 나보오. 어찌 할머니 얼굴을 다시 보겠어요.”

그러면서도 마당에 그냥 서서 쉬는 등산객들을 위해 통나무 의자를 만들어 놓는 산골의 인심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복이 없는 모양이오. 매년 여름 이름 난 심마니를 좇아 다녀도 산삼 잎사귀도 구경 못했어요. 그러다가도 내가 내려오면 꼭 산삼을 캔단 말이오.” 이씨가 산삼을 캐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산에서 잔뼈를 키워온 자신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산삼을 캔다고 헤매는 것보다는 나물이며 버섯 따는 것이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지만 산삼 꽃이 피는 여름 한철 산삼만을 찾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름에는 놀러 오는 사람들도 제법 많아요. 근데 꼭 몇 사람이 문제예요. 개울에는 산천어, 열목어, 버들치, 산메기 등이 지천인데 꼭 배터리로 고기를 잡는다 말이에요. 그러면 고기들이 다시 안 오는데….” 잠시 쉬다 떠나는 휴가객들에게 마장터 지킴이 이천만씨가 전하는 부탁이기도 하다.

 ** 대간령으로도 불리는 샛령은 국립공원에 편입되면서부처 출입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6-샛령-진부령-부럽지-않던-잊혀진-고개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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