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사람들 17 자병산- 아!! 도시의 회색과 맞바꾼 보라빛 절벽
작성일 18-08-2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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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244,742회 댓글 0건본문
기우제를 올리면 어떠한 가뭄에도 비를 내려주었다는 고마운 자병산은 이제 없다. 붉은 뼝대가 사라진 자병산은 이미 자병산이 아니다. 또하나의 자병산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조금씩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시멘트를 달라고 아우성이면서 시멘트 회사만 나무라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가. 돌아가는 길을 참고 다리를 놓는 것도 조심스러워 하자. 사라지는 자병산을 위로하는 우리들의 최선일 것이다.
보름달이 백두대간 능선을 넘는 늦은 밤이었지만 손영옥(68), 정춘랑(65) 할머니는 여태 잠자리도 펴지 못했다. 이불이 깔려 있어야 할 방에는 초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었다. 개두릅으로 불리는 엄나무 새순이었다. “오늘 낮에 쟤들이 따온 거래요.” 손 할머니의 눈길은 대견스러움이 달빛보다 더 밝게 흘렀다. 개두릅은 자병산에서 김윤기(30), 김광영(27)씨 두 사람이 한나절 동안 딴 것이라 했다.
다음날 중간상인이 찾아오기 전까지 한 두름에 1kg 정도가 나가게 두름으로 엮어야 한다고 했다. 한 두름에 7천∼8천원. 넉넉 잡아 50두름은 족히 나갈 것 같다. 이런 날이 흔치 않은지라 밤을 새워가며 개두릅을 엮으면서도 표정은 밝기만 하다.
그러나 두리봉(1033) 석병산(1055)을 넘으며 동북쪽으로 만덕봉(1035) 줄기를 세우고 동남쪽에는 자병산(872)을 세워 산계리에 사람이 살 만한 터전을 내준 백두대간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석회석 광산이 된 자병산 때문이다. 산계팔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는 자병산 붉은 뼝대(절벽)는 석회석을 파내느라 갈갈이 찢겨 겨우 서쪽 사면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자연에 기대 살던 시절 자병산은 대접받는 산이었다. 가뭄이 오래돼 천수답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제물을 싸들고 자병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렸다. 그러면 어김없이 하늘은 비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자병산이 상처를 입기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였다. 그리고 불과 15년. 그 짧은 시간은 억겁의 세월을 의연하게 동해를 바라며 해풍을 막아내던 자병산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비극은 한라시멘트가 산계리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1978년부터 시작됐다. 한푼의 달러가, 한 포대의 시멘트가 급하던 시절이었다. 후발업체인 한라시멘트가 산계리에 공장을 세운 것은 항만시설을 갖추기 좋은 동해가 지척인데다 자병산의 석회석 질도 좋은 탓이었다. 정부도 지원하고 나섰다. 시멘트는 국가개발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었다. 주택 200만호 건설을 외치던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수출중단까지 들먹이며 시멘트 생산을 독려했다. 그래도 부족한 시멘트를 구하기 위해 비싼 달러가 나갈 때는 한치라도 산을 더 파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자병산 하얀 뼈는 어느 집 기둥이 되고 어느 골목길 보도블록이 되고 어느 다리의 상판으로 사라져갔다.
문제는 산에서 삼겹살 구워먹는 일이 죄가 될 정도로 세월이 변하고도 한참 뒤인 90년대에 들어서야 불거지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변한 자병산의 모습은 때마침 불기 시작한 백두대간 열풍과 맞닥뜨렸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이들에게 마루금 지척까지 파고든 석회석 채굴 현장은 차라리 분노였다. 동해시의 시민단체인 백두대간보전회가 나섰다.
백두대간보전회의 치열한 싸움이 몇 년간 계속되면서 여론이 움직였고 산림청도 여론을 따랐다. 95년 12월 산림청은 한라시멘트에 내준 백두대간 마루금 인근의 국유림사용허가를 철회하게 된다. 그러나 기왕에 허가를 받아 진행된 지역에 대한 채광은 중단되지 않았다. 면적을 넓혀가지 못한 채광은 되레 화를 불렀다. 산을 파내려 가는 경사가 더욱 가팔라지면서 정상 부근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5년을 끌어오던 한라의 233ha에 대한 개발 신청이 98년 12월 받아들여진 데는 그런 배경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개발허가가 떨어지기까지 5년에 걸쳐 5차례의 환경영향평가 보완이 이뤄지면서 면적도 64.5ha로 줄었다. 여기서 나오는 석회석으로 한라시멘트는 앞으로 10여년은 석회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병산 정상은 사라진다. “내버려두면 너무 위험하거든요. 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약 145m 정도 높이가 낮아지게 됩니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절대로 건드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라시멘트쪽은 환경친화적인 복구계획까지 설명을 더한다. 비산먼지를 줄이기 위해 살수차가 연신 물을 뿌려댄다. 이미 채광이 끝난 지역엔 제법 나무도 심어져 있다. 그러나 자병산은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주민들도 엉망인 자병산이 가슴아팠지만 개발에 도장을 찍었다. “안 하면 좋지요. 그러면 옥계는 어떻게 된대요?” 옥계인구 8천여명 가운데 한라시멘트에 직접 생계를 기댄 이들만 1천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법원조차 지역경제 파탄을 우려해 화의신청을 받아들일 정도로 한라시멘트는 이미 옥계지역 경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주민들은 미국의 투자중개회사 로스 차일드의 투자로 회생가닥을 잡은 것조차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RH시멘트라는 낯선 이름도 두 회사의 머릿글자를 따온 것이다.
문을 닫기엔 그동안 들인 엄청난 비용도 문제가 된다. 시멘트산업은 엄청난 시설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이다. 한라시멘트의 자산만 1조2천여억원대에 이르는 것도 엄청난 시설투자비 때문이다. 채광이 중단되고 공장이 멈추면 그 돈은 고스란히 산업쓰레기로 둔갑한다. 자병산 반대편인 만덕봉 골짜기를 파들어가던 산계리 황지미골의 또하나의 석회석 광산인 한보에너지 옥계광업소는 그룹의 부도로 문을 닫은 채 녹슬어가고 있었다. 머지 않아 산계리 맑은 물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를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규 채광 개발지에 대한 주민 동의에 반대하던 이들이 중심이 돼 꾸린 백두대간자병산보존회(회장 문승국)는 지난 5월1일, 2일 이틀 동안 백복령에서 자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 찾기 등산대회’를 열었다. 자병산이 ‘명산은 될 수 있어도 백두대간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직접 능선을 밟아 증명하고 자병산 훼손 현장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미 자병산 정상엔 유압착암기가 구멍을 뚫고 있다. 그렇다고 석병산 기슭 절골에 홀로 살면서 자병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공연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자병산을 한번이라도 본 이라면 개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계리가 광산 때문에 시름을 겪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폐허가 된 금광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고 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은광은 ‘천퍼랭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개발은 쉬워도 복구는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들이다.
시멘트는 국가기간 시설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석회석은 무한한 자원은 아니다. 현재의 수준으로 채광한다 해도 석회석은 100년 정도가 지나면 고갈된다고 한다. 그 뒤 우리 후손들은 무엇으로 다리를 놓고 집을 지을 것인가.
개발은 필요에서 비롯된다. 조금 빨리 가겠다고 길을 펴고 조금 편하게 살겠다고 멀쩡한 집을 부수는 일들이 결국 자병산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다. 시멘트를 달라고 아우성이면서 자병산 개발은 막겠다는 것은 모순일 뿐이다. 필요를 줄이지 않고 자병산 개발만을 막겠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산들을 더 빠른 속도로 망가뜨리겠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길은 우리 모두가 아끼는 데 있다. 부실공사를 추방하고 불필요한 공사를 자제하는 것도 또다른 자병산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 세대가 할 일이다. 석회석 채광으로 사라지는 산은 자병산뿐이 아니다. 영월에서 제천에서 단양에서 그리고 옥계의 남쪽 삼척과 동해에서도 산은 시멘트를 위해 파헤쳐지고 있다.
“개발하는 기업은 환경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돼요. 정부 기관은 그것을 감시하고 사후 복구대책을 가능성 있는 것으로 명확하게 제시해야 하고요. 근데 이게 안 돼요. 죄다 눈치보기만 바쁘지. 그러니까 녹화하란다고 묘목을 심어도 살까 말까한 돌덩이 위에 대목을 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요.” 신익선(51)씨의 따가운 충고다.
환경 당국은 환경영향평가서를 몇 번씩 반려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환경감시원을 현장에 상주시키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박살난 산을 활용할 방안을 이제라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땅이 우리만 살다 갈 땅은 아니지 않은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7-자병산-아-도시의-회색과-맞바꾼-보라빛-절벽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보름달이 백두대간 능선을 넘는 늦은 밤이었지만 손영옥(68), 정춘랑(65) 할머니는 여태 잠자리도 펴지 못했다. 이불이 깔려 있어야 할 방에는 초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었다. 개두릅으로 불리는 엄나무 새순이었다. “오늘 낮에 쟤들이 따온 거래요.” 손 할머니의 눈길은 대견스러움이 달빛보다 더 밝게 흘렀다. 개두릅은 자병산에서 김윤기(30), 김광영(27)씨 두 사람이 한나절 동안 딴 것이라 했다.
다음날 중간상인이 찾아오기 전까지 한 두름에 1kg 정도가 나가게 두름으로 엮어야 한다고 했다. 한 두름에 7천∼8천원. 넉넉 잡아 50두름은 족히 나갈 것 같다. 이런 날이 흔치 않은지라 밤을 새워가며 개두릅을 엮으면서도 표정은 밝기만 하다.
그러나 두리봉(1033) 석병산(1055)을 넘으며 동북쪽으로 만덕봉(1035) 줄기를 세우고 동남쪽에는 자병산(872)을 세워 산계리에 사람이 살 만한 터전을 내준 백두대간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석회석 광산이 된 자병산 때문이다. 산계팔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는 자병산 붉은 뼝대(절벽)는 석회석을 파내느라 갈갈이 찢겨 겨우 서쪽 사면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자연에 기대 살던 시절 자병산은 대접받는 산이었다. 가뭄이 오래돼 천수답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제물을 싸들고 자병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렸다. 그러면 어김없이 하늘은 비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자병산이 상처를 입기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였다. 그리고 불과 15년. 그 짧은 시간은 억겁의 세월을 의연하게 동해를 바라며 해풍을 막아내던 자병산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비극은 한라시멘트가 산계리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1978년부터 시작됐다. 한푼의 달러가, 한 포대의 시멘트가 급하던 시절이었다. 후발업체인 한라시멘트가 산계리에 공장을 세운 것은 항만시설을 갖추기 좋은 동해가 지척인데다 자병산의 석회석 질도 좋은 탓이었다. 정부도 지원하고 나섰다. 시멘트는 국가개발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었다. 주택 200만호 건설을 외치던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수출중단까지 들먹이며 시멘트 생산을 독려했다. 그래도 부족한 시멘트를 구하기 위해 비싼 달러가 나갈 때는 한치라도 산을 더 파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자병산 하얀 뼈는 어느 집 기둥이 되고 어느 골목길 보도블록이 되고 어느 다리의 상판으로 사라져갔다.
문제는 산에서 삼겹살 구워먹는 일이 죄가 될 정도로 세월이 변하고도 한참 뒤인 90년대에 들어서야 불거지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변한 자병산의 모습은 때마침 불기 시작한 백두대간 열풍과 맞닥뜨렸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이들에게 마루금 지척까지 파고든 석회석 채굴 현장은 차라리 분노였다. 동해시의 시민단체인 백두대간보전회가 나섰다.
백두대간보전회의 치열한 싸움이 몇 년간 계속되면서 여론이 움직였고 산림청도 여론을 따랐다. 95년 12월 산림청은 한라시멘트에 내준 백두대간 마루금 인근의 국유림사용허가를 철회하게 된다. 그러나 기왕에 허가를 받아 진행된 지역에 대한 채광은 중단되지 않았다. 면적을 넓혀가지 못한 채광은 되레 화를 불렀다. 산을 파내려 가는 경사가 더욱 가팔라지면서 정상 부근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5년을 끌어오던 한라의 233ha에 대한 개발 신청이 98년 12월 받아들여진 데는 그런 배경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개발허가가 떨어지기까지 5년에 걸쳐 5차례의 환경영향평가 보완이 이뤄지면서 면적도 64.5ha로 줄었다. 여기서 나오는 석회석으로 한라시멘트는 앞으로 10여년은 석회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병산 정상은 사라진다. “내버려두면 너무 위험하거든요. 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약 145m 정도 높이가 낮아지게 됩니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절대로 건드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라시멘트쪽은 환경친화적인 복구계획까지 설명을 더한다. 비산먼지를 줄이기 위해 살수차가 연신 물을 뿌려댄다. 이미 채광이 끝난 지역엔 제법 나무도 심어져 있다. 그러나 자병산은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주민들도 엉망인 자병산이 가슴아팠지만 개발에 도장을 찍었다. “안 하면 좋지요. 그러면 옥계는 어떻게 된대요?” 옥계인구 8천여명 가운데 한라시멘트에 직접 생계를 기댄 이들만 1천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법원조차 지역경제 파탄을 우려해 화의신청을 받아들일 정도로 한라시멘트는 이미 옥계지역 경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주민들은 미국의 투자중개회사 로스 차일드의 투자로 회생가닥을 잡은 것조차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RH시멘트라는 낯선 이름도 두 회사의 머릿글자를 따온 것이다.
문을 닫기엔 그동안 들인 엄청난 비용도 문제가 된다. 시멘트산업은 엄청난 시설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이다. 한라시멘트의 자산만 1조2천여억원대에 이르는 것도 엄청난 시설투자비 때문이다. 채광이 중단되고 공장이 멈추면 그 돈은 고스란히 산업쓰레기로 둔갑한다. 자병산 반대편인 만덕봉 골짜기를 파들어가던 산계리 황지미골의 또하나의 석회석 광산인 한보에너지 옥계광업소는 그룹의 부도로 문을 닫은 채 녹슬어가고 있었다. 머지 않아 산계리 맑은 물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를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규 채광 개발지에 대한 주민 동의에 반대하던 이들이 중심이 돼 꾸린 백두대간자병산보존회(회장 문승국)는 지난 5월1일, 2일 이틀 동안 백복령에서 자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 찾기 등산대회’를 열었다. 자병산이 ‘명산은 될 수 있어도 백두대간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직접 능선을 밟아 증명하고 자병산 훼손 현장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미 자병산 정상엔 유압착암기가 구멍을 뚫고 있다. 그렇다고 석병산 기슭 절골에 홀로 살면서 자병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공연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자병산을 한번이라도 본 이라면 개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계리가 광산 때문에 시름을 겪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폐허가 된 금광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고 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은광은 ‘천퍼랭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개발은 쉬워도 복구는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들이다.
시멘트는 국가기간 시설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석회석은 무한한 자원은 아니다. 현재의 수준으로 채광한다 해도 석회석은 100년 정도가 지나면 고갈된다고 한다. 그 뒤 우리 후손들은 무엇으로 다리를 놓고 집을 지을 것인가.
개발은 필요에서 비롯된다. 조금 빨리 가겠다고 길을 펴고 조금 편하게 살겠다고 멀쩡한 집을 부수는 일들이 결국 자병산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다. 시멘트를 달라고 아우성이면서 자병산 개발은 막겠다는 것은 모순일 뿐이다. 필요를 줄이지 않고 자병산 개발만을 막겠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산들을 더 빠른 속도로 망가뜨리겠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길은 우리 모두가 아끼는 데 있다. 부실공사를 추방하고 불필요한 공사를 자제하는 것도 또다른 자병산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 세대가 할 일이다. 석회석 채광으로 사라지는 산은 자병산뿐이 아니다. 영월에서 제천에서 단양에서 그리고 옥계의 남쪽 삼척과 동해에서도 산은 시멘트를 위해 파헤쳐지고 있다.
“개발하는 기업은 환경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돼요. 정부 기관은 그것을 감시하고 사후 복구대책을 가능성 있는 것으로 명확하게 제시해야 하고요. 근데 이게 안 돼요. 죄다 눈치보기만 바쁘지. 그러니까 녹화하란다고 묘목을 심어도 살까 말까한 돌덩이 위에 대목을 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요.” 신익선(51)씨의 따가운 충고다.
환경 당국은 환경영향평가서를 몇 번씩 반려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환경감시원을 현장에 상주시키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박살난 산을 활용할 방안을 이제라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땅이 우리만 살다 갈 땅은 아니지 않은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7-자병산-아-도시의-회색과-맞바꾼-보라빛-절벽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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