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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우형씨 <대동여지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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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89회 작성일 18-08-0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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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우형씨 <대동여지도> 완성했다.

      누락된 <동여도>의 지명 옮겨 넣은 새 <대동여지도> 완간

  한국지도사에서 불멸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진가가 사장되다시피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는 대작업을 산악인으로서 20여년간 지도 제작에 전념해 온 현대판 김정호 이우형씨(56.李祐炯.광우당 대표)가 완성했다. 그는 고산자(古山子)가 당시 목각(木刻)의 어려움 때문에 <대동여지도>에는 일부 누락됐던 <동여도(東輿圖)>상의 옛지명을 대동여지도에 몽땅 옮겨 3분의 2 축소판을 발행하는 한편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를 함께 발행,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우형씨에 의해 실로 100여년만에 고산자의 그 완전한 뜻이 이뤄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이르면 잠자리에서도 생각했지요. 왜, 왜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그만 자야지 하고 돌아눕다 보면 환한 새벽이곤 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숨겨진 뜻을 풀어 나가기 위해 보냈던 지난 5년간에 걸친 각고의 나날을 이우형씨는 그렇게 돌이킨다.

고산자 김정호는 필사본인 <동여도>를 기본으로 목각본인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상에는 총19,000여 개였던 지명 가운데 7,400여 개를 뺀, 11,700여 개만 대동여지도에 판각했다. 현대판 김정호로 불리는 이우형씨는 이 누락된 지명을 일일이 확인해 추가인쇄한 대동여지도 3분의 2 축소판 300부와 함께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를 발행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동여지도>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우형씨 그에게 외려 '왜'하는 의문사를 던지게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항공촬영으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지도가 얼마든지 있는 이 현대에 무엇하러 그 냄새나는 묵은 옛지도를 가지고 무려 5년이나 씨름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당연한 질문이라면서 이우형씨는 그 자신도 연구를 해 나가는 도중 <대동여지도>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지도 제작자로서 고산자에게 갖게 된 애정이 대동여지도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대동여지도>를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말 경이었는데, 그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사이 이것이 보통 정성과 뜻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에게 헬리콥터를 한 대 주고 해보라고 해도 10년 세월은 족히 걸리겠다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방대한 작업에 손을 댔을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85년에 단순작업으로서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제작, 발행한 후 곧이어 연구에 들어갔다.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과연 그는 세간에서 알고 있는 대로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오르내리며 직접 전국을 누비고 다녔는가, 산줄기 표시는 어떤 기준으로 굵기를 달리했는가, 평야지대에까지 선명한 산줄기를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저마다 틀리게 그린 산봉 모양에는 어떤 기준을 두었는가, 한자로 된 지명 표기는 우리말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각 지점간 도로 표시는 점을 찍은 간격이 지역에 따라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붓으로 대강 찍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등등

 고산자가 제작한 지도는 <대동여지도>외에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가 있다. 이 세 가지 지도는 다음과 같은 연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학계에는 밝혀져 있다. 즉 김정호는 그의 나이 30세 때 당시까지 있었던 각 지역별 지도에서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우선 지리서적 사항도 세세히 기록한 원도로서 <청구도>를 제작했다. 그 후 20년간 각종 자료를 수집해 모은 자료서인 『여도비지(輿圖備志)』등의 자료와 <청구도>를 바탕으로 필사본(筆寫本)인 <동여도>를 제작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밀한 고지도인 이 <동여도>를 바탕으로 고산자는 60세 때 최종목적인 지도의 대량 유포와 전사(傳寫)의 오류를 막기 위한 목판본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이우형씨는 우선 <대동여지도>의 할아버지격이자 고산자 자신이 쓴 범례가 기록된 <청구도>와, 지도와는 따로이 비망한 강역표, 국고표, 방위표, 도리표 등을 후일 집대성한 자료인 『여도비지』에 주목했다. 이 작업에서 그는 우선 대강의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산마루와 물줄기는 땅의 근골과 혈맥이다'라는 말에서는 지도 제작의 근본 이념을 알 수 있었죠. 기록된 지명의 정확한 위치는 마지막 글자의 가운데로 하고 여백에 따라 상하 또는 옆으로 적었고, 사방을 12방으로 나누었으며, 읍을 중심으로 겹친 동그라미를 긋고 그 사이를 10리로 간주한다, 높은 산은 포갠 봉우리로 표시하고 나머지는 톱니 모양으로 한다는 등의 대목, 그리고 축척표를 통해 우선 궁금증을 대강 풀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지도상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인 축척과 지점간의 거리가 그 중 하나였다. 학계에서는 그간 <대동여지도>의 축척을 16만분의 1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는 10리는 4km라는 현재의 거리 개념과, 현대지도와 대동여지도의 도상 지점간 거리나 넓이의 비교에 의거한 수치다. 그러나 고산자 당시에도 10리가 4km에 해당한다는 근거는 어디에고 없었다. 해서 그는 <대동여지도>의 축척표에 나타난 백리척과 <대동지지>에 명기된 거리 규정을 참고하여 대동여지도의 10리는 약 5.4km이며 축척은 21만 6천분의 1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86년 여름 그는 자신의 이 추정을 학계에 발표, 주목을 끌었다.

거리 표시에서 좀체로 풀리지 않는 의문은 도로상 10리 단위를 나타낸 점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대강 찍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러나 고문서를 통해 고산자에게 느껴지는 지도에 대한 열정의 농도로 보아 고산자가 스스로에게 그런 태만은 절대 용납치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 믿음으로 <대동여지도>를 세밀히 살펴 나가던 어느날 그는 중요한 차이를 발견했다. 평야지대는 점간의 간격이 2.5cm로서 거의 일정한데 비해 산지, 특히 금강산역에서는 1.5cm로 크게 좁아지고 있었다. 즉 고산자는 단순 수평거리가 아니라 실제 걷는 거리를 도상에 표현했던 것이다.

현대지도와 정확히 일치

 도로상의 거리 표시 하나에도 그런 정성을 들였음을 안 이씨는 각 산맥의 흐름도 대강 그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항공촬영을 하여 만든 현대의 지형도와 그 정확성을 비교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우선 국립지리원 발행의 2만 5천분의 1, 혹은 5만분의 1지형도 전국분을 구입해 능선을 하나하나 그린 다음 25만분의 1지형도에 청사진을 떠 옮겼다. 이어 다시 이것을 50만분의 1지형도로 옮기고 대동여지도도 그와 같은 크기로 축소한 후 겹쳐 보았다. 거의 완벽하게 두 지도- 100여년 전에 만든 <대동여지도>와 항공촬영으로 파악한 현대 지도의 능선 모양은 일치하고 있었다. 그는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 작업 이후 그에게는 새로운 의문이 떠 올랐다. 현대 지형도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은 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는 명확하고도 큰 선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다는 점이다. 한남정맥(漢南正脈) 끝부분의 김포평야 일대가 특히 그랬다. 그 밋밋한 논바닥에 무슨 이렇게 굵은 산줄기가 있다는 말인가. 답답증에 자다 말고 일어나, '어디, 고산자 당신의 혼백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기도 하던 그는 직접 답사에 나섰다. 김포 평야에 가서 논의 모양을 세심히 살펴 보았다. 얼핏 보기에 거의 수평면인 김포평야였지만, 그 평야를 동서로 나누는 이른바 유역 능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유역릉을 확인한 순간이 전 작업을 통해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그는 돌이킨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강줄기가 두 개의 선으로 표현되다가 어느 정도 상류부에 이르면 한 줄로 합쳐진다. 지도제작자에게, 더구나 고산자에게 의미없는 선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 아래 그는 또한 그 의미를 캤다. 강줄기마다 보이는 그 부분들의 공통점을 찾아 보았다. 첫째, 두 선이 합쳐지는 곳의 상류부에서 <대동지지>에 밝혀진 10대 도로와 중요 간로(間路)상의 나루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즉, 도선이 올라갈 수 있는 상한점인 것 같았다.

점 하나에도 깊은 뜻 담겨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이우형씨는 낙동강 상류로 가 60여 년 전 사공일을 두 노인을 만나 물었다. (대동여지도)상의 낙동강을 표시한 선이 하나로 합치는 그 지점까지 벼 200섬을 실은 돛배가 운항되었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상류에서 흘러 든 나무를 뗏목으로 엮던 곳이라고도 했다. 선이 합해지는 곳은 말하자면 가항점(可航點)-배가 운항될 수 있는 상한점이었던 것이다.

이들 여러 가지의 확인 작업 이후 그는 우리 조상들이 가진 땅에 대해 가졌던 관념을 비로소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주변의 딴 나라들을 생각해 보았죠. 중국은 허허벌판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일본은 산은 많되 급사면과 협곡이 대부분이죠. 그러므로 두 나라 모두 삶은 산과 크게 유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지요. 하지만,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꽉 들어차 있는 우리에게 산은 곧 생활의 터전으로 인식이 되어 왔습니다.그리고 그 산에서 나온 물이 우리가 먹을 양식을 키우고, 또 그 물을 우리가 마시고.... 말하자면 땅이 곧 산이고 산이 곧 물이라는 인식으로 우리 조상들은 살아왔기에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우리의 고지도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평야지대의 능선줄기도 큰 물줄기를 나누는 것일 경우 그렇듯 선명하게 표시했던 겁니다."

김포평야 한가운데에 굳이 그렇게 선명한 산줄기를 표시한 것은 그것이 한남정맥의 원줄기로서 한강의 수계를 이루는 중요한 산줄기이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의 산경(山經) 표현은 네 가지 굵기가 나타난다. 제일 굵은 것은 나라 안의 근골이라 여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대간, 두 번째 굵기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큰 강의 울을 이루는 정맥을, 세 번째 굵은 것은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서 대체로 큰 내를 이룬 맥을, 마지막으로 제일 가는 것은 골을 이루는 작은 산줄기를 표현했다. 이런 구분은 물론 고산자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이우형씨는 밝힌다.

 "조선시대 우리에게는 하나의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으로 불리는 산맥들이 있었죠. 그 이름의 기준은 모두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미 조선조 이전부터 산맥에 대한 대강의 구분은 우리 조상들은 해왔습니다. 이를 신경준이 『산경표』로 정리했고, 고산자는 또한 이 구분법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즉, 이런 산맥 표현은 어느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겁니다."

있는 둥 만 둥 한 산자락 하나 너머임에도 '거기, 그런 작물은 안 돼'하는 농부들의 단정적인 말이나 고을 이름만 듣고도 거기 사람들은 여자 쪽이 부지런하다느니 모질다느니 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런 산줄기와 수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한 기본자료로도 <대동여지도>와 같은 자세한 지도는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이씨는 그런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고산자가 당시에 박해를 받았다는 말은 일제의 의도적인 왜곡이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럴 리가 없었죠. 사료로 보아도 고산자가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대원군과 독대를 할 만큼 큰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그를 후원했다는 사료가 여럿 있지요. 고산자가 골방에 숨어서 딸과 함께 어렵게 작업을 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인 것이, <대동여지도> 전도의 크기가 가로 4미터에 세로 8미터입니다. 어떻게 골방에서 그것을 목각하고 수십 권으로 찍고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는 말하자면 지리적 지식이 뛰어난 학자이자 편집자로서 전국 각 군과 현으로 기본 도면을 보내 자세한 자료를 받는 등, 중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작업을 했던 겁니다."

대량의 정보를 수록해서 읽기가 복잡한 현대지도보다 각지의 수경(水經)을 한결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등 뛰어난 점이 많은 이 <대동여지도>는 하지만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의 지명을 모두 수록하지 못했다. 이에 이우형씨는 현대 인쇄술을 이용, <동여도>에서 누락된 지명 모두를 <대동여지도>에 옮긴 후 3분의 2로 축소, 35장으로 나누어 발행한 것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벽이면 남한 전역만큼은 한 눈에 알아보게끔 붙일 수 있다.

 <대동여지도>3분의 2 축소판을 완성하기까지 그가 겪은 난관은 물론 많았다. <대동여지도>의 기본도로서 현존하는 필사본이 세 벌에 불과한 <동여도>를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등으로 찾아가, 워낙 희귀한 것이라 복사도 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등 고역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흥분에 가까운 보람으로 차 있다. 이렇게 <동여도>의 지명까지 옮긴 <대동여지도>는 각종 국학관계의 연구는 물론 앞으로 절실히 필요해질 국지(局地)기상예보 등 나라의 일에도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되살려 써야 할 지리개념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위해 세운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지리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질학에서나 필요한 개념일까, 우리 강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이죠.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면 기후나 토양도 바뀌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품성도 바뀌는 것인데, 우리는 어처구니없게도 그 일제의 지리 개념에 의해 무감각해진 체 별 생각없이 마구 파헤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조상은 이 땅을 뼈와 피의 흐름을 가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인식의 구현입니다.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 잃을 뻔했던, 그 현명했던 땅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 곧 불구가 되어가는 이 강토를 살리는 길입니다."

 홈지기 알림) 월간 「산」1990년 12월호의 기사를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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